2006.1.29..저녁..
저녁은 속이 불편하여 죽으로 떼우고 집을 나선다
디카랑 삼각대랑 ..함꾸네..
삼각대를 잡은 손아귀에 쇠에서 전해오는 차가움이
더해진다
오늘은 백제 25대 왕인 무녕왕을 만나러 가기 위해
바삐 서두른 것이다..
밤이랑 길을 잘못들어 한참을 걷다...
무녕왕릉에 앞에 도착해보니..오호라 통제여..어둑
컴컴한 분위기에 굳게 닫힌 출입 건물....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공산성만 생각하고..두서없이 찾은 내가 밉다.
이런들 어떠랴 ~ 공설운동장으로 ~ 박물관으로~
발품을 퍽이나 많이 팔고 왔으니...맘은 부자된
기분이라...과히 나쁘지만은 안 ~구먼
(무녕왕릉 퍼 온글)
1970년 6월 29일 공주의 송산리에 분포한 일단의 고분들
에 대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무녕
왕릉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고, 역사학사상 전
례가 없는 대발견이었습니다.
왕릉의 입구를 메우고 있는 밀폐석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
는 순간, 놓여있던 묘지석에서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
라는 글귀를 읽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
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마왕이란 바로 무녕왕의 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일본의 일본서기 혹은 중국의 고대 문헌에 글자 몇 자 씩으로만 모습을 보일 뿐인 무녕왕. 기록 속
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하던 무녕왕이 뚜렷한 모습의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칼을 차고,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가지고서 1,500여 년 전
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입
니다.
이 무녕왕의 발견은 세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때 발굴된 무녕왕릉을 통하여 서기 500년 경의 백제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북으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
처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다투며 남중국과 왜를 오고가던
국제적인 해상강국 백제. 우리는 그당시의 백제의 모습을
보려하는 것입니다.
무령왕릉의 개요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난 백제 25대 무령왕은 40세 되던
해인 501년 왕위에 올라 재위 23년 만인 523년 세상을 떠
났다.
무령왕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활발한 외
교정책을 통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방어망을 견고히 함
으로써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릉은 1971
년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습기제거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
던 중 발견되었는데, 이 왕릉은 전축분으로 당시 중국과 백
제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최고의 문화재들은 501년부터
526년이라는 절대년대를 가지고 있어, 백제는 물론 고구
려, 신라, 가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유물연구에도 결
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
공과 장례의식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하여 왕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금은제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어 국내
외의 다른지역 유물과의 비교연구에 절대적 위치 를 차지하
고 있다.
아직 완전히 영글지 않은 풋 달님..보름이 오시나 보다
무구한 세월을 함께 했을 노익의 처마와..달님
역시 우리의 건축은 소나무랑...함께 해야 맛이
담장...
아씨를 만나려 넘나들던 담장
밤 손님들이 작업하기 위해 넘나 들던 담장
호박이랑..박이랑 주렁주렁 놀던 담장
우리네 전통 가옥 품에...
어울리는 어여쁜 치마 폭 처럼..
오늘도 금강물은 유유히 흐르고...금관교의 모습도 비춰
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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